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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AC-130
         미국 영화 [[백악관 최후의 날]]에서는 [[북한]] [[테러리스트]]들이 조종하는 AC-130이 [[F-22 랩터]] 두대를 박살내고 [[워싱턴 D.C.]]를 쑥대밭으로 만든다.
  • 길정우
         [[1996년]] 중앙일보 [[워싱턴 D.C.]] 특파원 및 [[도쿄]] 특파원으로 근무하였다. [[2002년]]부터 중앙일보 논설위원.<ref>[http://www.journalist.or.kr/news/articleView.html?idxno=15324 2002년 중앙일보 논설위원] {{웨이백|url=http://www.journalist.or.kr/news/articleView.html?idxno=15324# |date=20140108132035 }}, 2007년 8월 1일자 기자협회보</ref>
  • 나향욱
         이후 지방교육자치과장을 하다가, 2012년 5월부터 미국 [[워싱턴 D.C.]]에 소재한 [[세계은행|월드뱅크(World Bank)]]에 파견되어 사회협력분야 업무를 맡았다. 거기서 약 3년간 억대 연봉(월급 $12,000)을 받았다.
  • 노무현
         6월 5일부터 6월 9일 [[미국]] [[워싱턴 D.C.]]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(FTA) 1차 협상이 개최되었다.
  • 박정양
         [[1887년]](고종 24년) 다시 [[협판]][[내무부|내무부사]](協辦內務府事)가 되었다가 그해 [[미국]] 특파 전권대사로 임명되었으나 조선주재 [[청나라]]군 최고사령관 [[위안스카이|원세개]](袁世凯)의 압력으로 출발하지 못하고 [[한성]]에 머무르며 출발을 연기하였으나 그해 연말에 [[청나라]]의 방해 공작을 무릅쓰고 [[제물포 항]]에 정박된 상선을 타고 비밀리에 건너갔다. [[미국]] [[워싱턴 D.C.]]에 부임하여 [[미국 대통령]] [[그로버 클리블랜드|클리블랜드]](S. G. Cleveland)에게 신임장을 제정받는 등 외교활동을 하였으며, 그의 미국행은 조선인 최초의 외교관 파견이었다. 이때 그는 백악관 대통령 관저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미국 대통령에게 큰 절을 하자 [[그로버 클리블랜드|클리블랜드]]가 매우 당황해하여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.
  • 윤치영
         윤치영의 하와이행에는 [[야구]]보다 중요한 비밀 임무가 있었다. 이는 [[미국]]에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[[윤치호]], [[이상재]](李商在), [[김성수 (1891년)|김성수]](金性洙) 등이 보내는 약 5만 달러의 자금을 [[이승만]]에게 전하는 사명이었다. 떠나기 직전 [[이상재]]는 윤치영의 귀에다 대고 "이놈아 잘 가져가. 가서 우남장 뵙거든 우리 모두 씩씩하게 일 잘한다고 전해라<ref name="경향19720408"/>"하고 안부 전할 것을 당부했다. 그는 자신의 아랫배 속옷에 돈을 감추어 [[일본]] 경찰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, 출국할 수 있었다. 그가 일행들을 데리고 [[부산]]에서 탄 배는 [[시모노세키]]-[[도쿄]]-[[요코하마]]를 거쳐 [[하와이]]에 도착했다. [[하와이]] 도착 직후 [[워싱턴 D.C.]]에서 달려온 [[이승만]]에게 그는 안부편지를 전하며 숨겨온 약 5만 달러를 전달했다
         그는 [[서대문 형무소]]에 3개월간 감금당했다.<ref name="경향19720408"/> [[일본]] 경찰로부터 [[워싱턴 D.C.|워싱턴]]의 [[구미위원부]]에서의 활동을 추궁당하다가, 일제는 그와 [[임시정부]]와의 비밀연락을 걸고 넘어졌다.<ref name="동산회고록:윤치영의 20세기 p.123"/> 이후 일본 경찰로부터 연락망을 대라, [[임정 구미위원부|임시정부 구미위원부]]의 국내 비밀공작을 대라, 해외 독립단체들과의 연락관계를 불라는 구타와 협박을 당하였다.
  • 이채연 (1861년)
         이채연은 1861년 [[경상북도]] [[칠곡군|칠곡]]에서 통사랑(通仕郞) 선공감가감역관(繕工監假監役官) 이이봉(李以鳳)의 아들로 태어났다. 1887년 번역관의 직책을 가지고 미국에 첫발을 내딧고 이듬해에 서기관이 되었다. 초대주미공사관의 관원은 전권공사 박정양, 참찬관 이완용, 번역관 이채연, 서기관 이하영, 이상재, 수행원 2명,무관 1명, 하인 2명 등 모두 10명이었고, 여기에 미국의 의사 알렌이 외국인 참찬관 자격으로 동행했으며, 박정양 일행보다 두 달 일찍 출발했다. 막상 이들 가운데 영어를 조금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완용, 이하영, 이채연 3명뿐이었다.<ref> 박성래 <韓國近代의 西洋語通譯史(2)1883년부터 1886년까지> 《국제지역연구》제7권 제1호, 2003, 353쪽. </ref> [[이완용]]에 이어 대리공사로 재직하던 중, [[미국]], [[워싱턴 D.C.]]에서 미국에서 태어난 첫 번째 한국인인 아들을 낳았다.<ref> The New York Times, October 13 1890. </ref> 워싱턴에서 태어난 그들의 첫 아기를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의 이름을 Ye Washon으로 지었지만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아들을 잃었다.<ref> The Baltimore Sun, December 25 1890. </ref> 1893년 [[시카고]]에서 열린 Chicago World's Columbian Exposition에서 한국관을 개설하고 총책임을 맡았다.<ref> Chicago Daily Tribune, May 2 1893. </ref> 이후 미국에서의 공식적인 모든 일정을 마치고 1893년 조선으로 귀국하여 고종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미국에서의 모든 임무를 끝마쳤다.<ref> The Washington Post, September 16 1893. </ref>
         <ref name="서울 도시개조사업의 주체와 지향성 ">이태진 <1896-1904년 서울 도시개조사업의 주체와 지향성> 《서울말연구》1997, 181~206쪽. </ref> 이채연은 길거리에서 물건을 팔거나 자판에서 상행위를 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엄히 다스려서 처벌하였다.<ref> 독립신문, 1897. 4. 17. </ref> 새 법궁이 된 경운궁의 대안문을 기점으로 방사성도로를 만들었는데, 이는 [[워싱턴 D.C.]]에서 대리공사로 재임하던 시절에 본 것을 한양 도로 정비 사업에 적용한 것이다.<ref name="서울 도시개조사업의 주체와 지향성 "/> 시청 앞 서울광장의 현재 모습도 한성 개조 사업 때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. 서울광장의 6거리 체계도 정연한 형태는 아니지만 외형상 방사상 도로에 속한다. 이채연 외에도 총리대신 겸 내부대신 [[박정양]], 내부 토목국장 이상재가 이 일을 추진했다. 서울의 궁궐과 종묘는 군주는 남쪽을 바라보며 백성을 다스린다는 유교 정신에 따라 북쪽 산 아래에 배치되어 있다. 하지만 유일하게 경운궁만이 도심 가운데로 나와 있다. 이는 1896년 2월 고종이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여 경복궁을 빠져 나와 러시아 공사관에 숨어 있는 상태에서 환궁하여 쓸 새로운 궁을 만들 때 한성 개조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.<ref> [http://www.hankyung.com/news/app/newsview.php?aid=2009052201611&intype=1] "[인문학 산책] 120여년전 서울광장에 숨겨진 고종의 개혁의지",《한경신문》, 2009.5.2. </ref> 독립신문은 이러한 이채연의 한성 개조 사업에 대해 높이 칭찬 하였다.<ref> 독립신문, 1897. 11. 7. </ref>
         미국에서 대리공사로 재직하던 중, 조선의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피로연을 [[워싱턴 D.C.]]에서 열게 되었다. 이 때, 미국의 상원 의원 Frye, Davis와 차관보 Mr.Quiney, Walker 제독 및 멕시코, 영국, 일본, 독일, [[니카라과]]의 공사들이 참여하는 등 국외에서도 많은 인맥을 소유하였다.<ref> The New York Times, March 26, 1893. </ref>
  • 이현우 (가수)
         * [[미국]] [[워싱턴 D.C.]] 위트 고등학교 졸업
  • 정인숙 (1945년)
         신원조회는 당시 [[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장|중앙정보부장]]이던 [[김형욱]]의 비서<ref name="hp104"/> 실장인 [[문학림]]이 맡았고, 고위층만이 가질 수 있었던 회수여권은 정일권의 비서관 [[신성재]]가 주선하였다.<ref name="hp105">김환표 외, 《스캔들에 갇힌 영혼들:시사인물사전 16》 (인물과사상사, 2002) 105페이지</ref> 여권 발급 날짜는 [[1968년]] [[12월 30일]]이고, 이후 정인숙은 [[1969년]] [[3월]] 큰오빠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[[일본]]에 다녀왔고, [[10월]]에는 [[워싱턴 D.C.]] 한인회장 [[노진환]]의 안내로 미국에서 3개월 동안 머물다가 [[1970년]] 1월 21일 귀국했다.<ref name="hp105"/>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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